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카 제국 (문단 편집) === [[학살]]과 주변 부족들의 반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야와르코차호수.jpg|width=100%]]}}} || || '''{{{#800000 잉카 군대의 학살로 피로 물들었던 야와르코차 호수}}}''' ||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잉카 제국과 주변 민족들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순수하게 콩키스타도르 병력의 힘만으로 잉카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동맹군들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결코 수백명의 병력으로 수백만명의 인구를 지닌 대제국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스페인인들을 지원하는 주력군은 언제나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잉카인들을 적극적으로 배신한 민족은 에콰도르의 '''카나리족'''이었다. 이는 투팍 유판키 황제에게 정복당한 과거가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이었고, 피사로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는 투메밤바라는 도시가 아타우알파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황제인 아타우알파는 도시 시민 50,000명 중 38,000명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상 도시 인구의 80%을 한꺼번에 몰살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 밖에도 과거 잉카의 적수였으나 패배해서 정복된 '''창카족''', '''우앙카족''', 아마존의 '''차차포야족'''이 스페인군을 지지했다. 아마존 부족들은 잉카 황제가 과거 자신들의 족장의 껍질을 벗겨 북으로 만들어버린 원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카르망 베르낭, 시공사] 잉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정복당한 '''치모르'''('''치무''')족도 스페인군의 길잡이 역할을 했고, 잉카 내부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려줘서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잉카 제국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탓에 주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모자랐다. 특히 에콰도르 지방은 투팍 유판키-우아이나 카팍-아타우알파 3대에 걸쳐 끈질기게 잉카에 저항한 탓에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의 호수'''' 사건인데, 1520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카란키 반군을 진압한 다음 이 지방의 모든 남성들을 학살하고 호수에 던져 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전설이다. 이때부터 이 호수의 이름이 Blood Lake라는 의미를 가진 야와르코차 호수로 바뀌었다. 이 학살로 대략 30,000명에서 50,000명의 카란키족 남성들이 살해당했고 이 지방에서 잉카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훗날 호수 바닥에서 진짜로 잉카군에게 살해당한 흔적이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툼베스를 파괴한 것도 아타우알파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잉카 내전 시기 쿠스코로 가는 요충지에 위치한 툼베스 시는 아타우알파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 피사로가 생존자 소년을 한 명 데려다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통역관으로 삼았는데, 이 아이의 세레명이 '펠리피요'였다. 펠리피요는 자신의 고향이 파괴된 복수로 아타우알파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되게 통역했고, 결국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명령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펠리피요가 아타우알파의 통역을 거짓되게 한 이유는 황제의 궁녀와 통정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로 구성된 약 30,000명의 원주민 지원군은 에르난도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군대 200명이 쿠스코에 포위되어 있을 때 봉기한 망코 잉카의 100,000명의 잉카 대군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가 바로 쿠스코 공방전이다. 참고로 잉카 제국도 흉흉한 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복한 지방의 백성들을 일부 강제 이주시키고, 잉카에 충성스러운 지방 시민들을 채워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잉카의 지배가 워낙 가혹했기에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잉카는 정복한 지방을 또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는 일이 상당히 잦았다고 한다. 이 강제 이주 정책은 [[아시리아]]나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당시 [[소련]]의 정책과 굉장히 유사하다.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